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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도미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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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도미마사는 미카와국 출신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었다. 그는 유키 히데야스를 섬기며 규슈 정벌과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했고, 유키 가문이 에치젠국으로 이동한 후에는 가로로서 후쿠이 번을 다스렸다. 에치젠 소동과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에치젠 번의 가신 수장으로 정치, 행정 면에서 활약했으며, 에치젠 후추를 개발하고 오로시소바를 장려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그는 다이묘에 준하는 격식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료센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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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마쓰오카 번을 세우고 초대 번주가 되어 영내 치수와 주민 소통에 힘쓰며 주물 산업을 발전시키는 등 통치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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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도미마사
기본 정보
씨명본다 도미마사
한자 표기本多富正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겐키 3년 (1572년)
사망게이안 2년 8월 12일 (1649년 9월 18일)
개명도미마사 → 모토아키라 / 모토아키라사이
이명도미마사, 겐시로, 본다 이즈미노카미
계명보쇼인덴 모토아키라 쇼엔 다이코지
묘소후쿠이현 에치젠시 후카쿠사의 류센지
관위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단바노카미
주군유키 히데야스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 다다마사 → 미치테루
에치젠 후쿠이번가로
씨족에치젠 후추 본다가 (본다 구라노스케 가문)
부모아버지: 본다 시게토미
배우자오구리 시게쿠니의 딸
자녀마사나가, 마사후사, 후렌, 모즈키 요시히사 실
양자: '요시마쓰'(유키 히데야스 4남)

2. 생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혼다 시게토미의 아들로 태어나[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를 섬기며 성장했다. 히데야스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무공을 세웠고, 히데야스가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번주가 되자 쓰케가로로서 후추 지역 3만 9천 석을 다스리며 번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히데야스 사후에는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나오를 보좌했으며, 번 내부의 권력 다툼인 에치젠 소동을 극복하고 번의 안정을 도모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여름 전투에서는 오사카성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웠다. 주군 타다나오가 배류된 후에도 그의 동생 마쓰다이라 타다마사를 섬기며 에치젠 번의 정치와 행정을 이끌었고, 만년에는 은퇴하여 164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6]

2. 1. 초기 생애와 유키 히데야스 섬김

겐키 3년(1572년), 도쿠가와 씨의 가신 혼다 시게토미의 아들로 미카와국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시게토미의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이에야스의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부속 가신이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노부야스가 할복하자 그 책임을 지고 자결했으며, 이후 도미마사는 숙부인 혼다 시게쓰구에게 양육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에치젠국 후추(현 후쿠이현 에치젠시)에서 시게토미 부부의 위패가 발견되는 등, 도미마사가 에치젠에 들어간 이후에도 시게토미가 생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양친의 묘소는 훗날 도미마사의 영지가 된 에치젠 후추의 요간지에 남아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시게토미는 노부야스 사건 이후 잠시 칩거했으며, 동생 시게쓰구의 가신으로 지내며 시게쓰구의 영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오사카로 보내질 때, 도쿠가와 가문은 시게쓰구의 적자 센치요(후의 혼다 나리시게) 등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시게쓰구는 센치요 대신 조카인 겐시로(도미마사)로 교체했다. 이는 시게쓰구가 친아들의 안위를 걱정했거나(히데야스는 생부 이에야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혹은 불우한 처지의 형의 아들을 출세시키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행동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고, 시게쓰구는 이에야스로부터 가즈사국 후루이도(현 지바현 기미쓰시) 3,000석 영지에서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미마사는 히데야스를 가까이에서 섬기게 되었다. 훗날 히데야스의 넷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기도 했으나, 그 아들은 일찍 사망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부하로서 주군 히데야스는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도미마사도 이를 따라 군공을 세웠다. 이후 히데야스가 시모사국의 명문 다이묘 유우키 하루토모의 양자가 되어 '유우키 히데야스'로 이름을 바꾸고 유우키 가문의 10만 석 영지를 상속받자, 도미마사는 봉록 100석을 받았다. 유우키 가문이 에치젠국으로 영지를 옮길 때까지 봉록은 3,000석까지 늘어났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는 나고야성에 주둔하며 한반도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히데야스와 함께 우츠노미야에 주둔했다.

게이초 10년(1605년) 4월, 히데야스가 종3위 権中納言|곤추나곤일본어 관위를 받자, 도미마사는 게이초 16년(1611년) 3월에 종5위하 伊豆守|이즈노카미일본어 관직을 받고, 이전의 志摩守|시마노카미일본어에서 이즈노카미로 칭호를 변경했다.

2. 2. 후쿠이번 가로 부임과 에치젠 소동

세키가하라 전투 후, 유키 히데야스는 에치젠 6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01년(게이초 6년) 2월, 기타노쇼성(후의 후쿠이성) 인수를 위해 가토 야스카쓰와 함께 도미마사가 파견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이미 도미마사의 이름으로 개간, 용수 정비 등의 지시가 내려졌다. 같은 해 7월 히데야스가 기타노쇼성에 입성하면서 마쓰다이라 가문에 의한 후쿠이번이 시작되었다. 도미마사는 쓰케가로로서 후추(다케후) 3만 9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1606년(게이초 11년) 주군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가신들 중에서는 준사(오바라)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도미마사는 병세가 깊던 히데야스를 대신하여 슨푸성 개축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사를 행할 수 없었다. 준사가 이어지는 상황을 우려한 에도 막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특사 곤도 스에요리를 파견했다. 곤도는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막부 신하 혼다 마사즈미 명의의 서장을 전달하여, 이마무라 모리쓰구, 가타야마 깃지 등 후쿠이번 중신들, 특히 도미마사의 준사를 엄격히 금지했다. 이로 인해 도미마사는 삭발하는 것에 그쳤다. 또한 막부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도미마사는 계속해서 후쿠이번의 집정을 맡아 히데야스의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나오를 보좌하게 되었다. 1607년(게이초 12년), 혼다 가문은 본번과는 별도로 에도에 상저택과 하저택을 받았으나, 도미마사는 "상저택만으로 충분하다"며 하저택을 반납했다.

히데야스의 장례와 인계 절차를 마친 후, 도미마사는 타다나오와 함께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배알했다. 1611년(게이초 16년), 도미마사는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타다나오에게 히데타다의 딸 쇼키가 시집왔는데, 어린 쇼키가 후쿠이로 가는 도중 도미마사의 에치젠 후추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화장(철장의 의식, 여성의 성인식)을 치른 후 후쿠이로 향했다.

1612년(게이초 17년), 번 내 중신들 간의 대립으로 인해 오이에 소동인 에치젠 소동(구제 소동)이 일어났다. 두 파벌로 나뉜 번사들 중 한 파의 대표로서 도미마사는 에도로 소환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직접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초기에는 도미마사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이에야스의 판결로 상대 파벌의 이마무라 모리쓰구 등은 추방 처분을 받았고 도미마사 측이 승소했다. 이후 도미마사는 이에야스에게 불려가 엄한 질책을 받는 동시에 그의 충의를 칭찬받았으며, "어린 타다나오를 앞으로도 잘 보좌하라"는 명을 다시 받았다. 1613년(게이초 18년), 막부는 후쿠이번에 새로운 쓰케가로로서 혼다 나리시게를 파견했다. 이 인사는 도미마사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또한, 도미마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리시게의 아들 혼다 시마를 양자로 삼았다.

2. 3. 오사카 전투에서의 활약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자, 혼다 도미마사는 친 도요토미 성향이 강했던 에치젠 가문을 설득하여 막부 측으로 참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겨울 전투에서 도미마사는 요시다 시게타카(修理), 야마카와 요시노부, 오키타 나가시게 등 에치젠 군을 이끌고 에치젠 후추에서 출진했다. 오미 오쓰에서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와 합류한 후, 도미마사와 혼다 나리시게가 좌우 선봉을 맡아 오사카 덴노지 부근에 포진했다.

그러나 에치젠 군은 도도 다카토라의 계략[4]이 실패하면서 벌어진 난전에 휘말렸다. 군령을 어기고 공격에 나섰다가, 해자를 넘어 돌격하는 아군과 적군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하는 기무라 시게나리 부대와 사나다마루의 사나다 유키무라 군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가가 번(마에다 도시쓰네) 군세 등도 함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후방의 이에야스 본진에서 파견된 안도 나오쓰구가 퇴각 명령을 전달했지만, 다다나오와 이이 나오타카 군세 등은 물러서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 결국 에치젠 가문의 가신 오구리 마사카쓰가 도미마사의 우마지루시를 빼앗아 후퇴시키자, 이를 본 다른 부대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투 후 도미마사와 나리시게는 차우스야마의 이에야스 본진으로 불려가 질책을 받았다(사나다마루 전투 참조).
오사카 여름 전투오사카 여름 전투 때는 양자인 시마(島)를 영지에 남겨두었으나, 시마는 명령 없이 오사카로 달려왔다. 최종 결전 전날 밤(5월 6일), 도미마사와 나리시게는 다시 이에야스에게 불려가 에치젠 군의 부진한 활약에 대해 직접적인 질책을 받았다.[5] 이때 이에야스가 "일본 제일의 겁쟁이"라고 말한 것에 격분한 다다나오 이하 에치젠 군 전체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다다나오와 함께 전장의 흙이 되어 오늘의 오명을 씻겠다"고 결의했다. 밤중에 요시다 시게타카의 인도로 최전선으로 이동하여, 가가 번 군세[6]에게 배정되었던 선봉 자리를 차지하는 군령 위반을 저질렀다. 이때 도미마사는 가신들에게 "나는 전사할 각오이니 모두 따르라"고 알렸다.

다음 날(7일) 아침, 에치젠 군의 선두에 선 도미마사는 병사들에게 식사를 마치고 충분히 준비시킨 후, 사나다 유키무라 군세와 정면으로 격돌했다.[7] 도미마사는 휘하 장수들과 다다나오의 동생들(마쓰다이라 다다마사 등)과 함께 에치젠 병사들의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교바시구치 문 옆 담벼락에 직접 올라서서 오사카성 제일 먼저 입성했음을 외쳤다.[8][9][10]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시마와 함께 오사카 성 혼마루에 돌입하여, 센조지키(千畳敷)의 병풍과 족자를 탈취하여[11] 제일 먼저 성에 오른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 도미마사 휘하 부대가 오사카 측 장수 오타니 요시하루[12]를 죽이는 등, 에치젠 군이 거둔 적의 목은 3,700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에치젠 군의 이러한 활약은 전쟁 후, 掛かれ掛かれ 越前衆よ、断掛かれ 越前衆よ、命知らずの黒ばんば|카카레 카카레 에치젠슈요, 단카카레 에치젠슈요, 이노치시라즈노 쿠로반바일본어라는 장단가가 유행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전투 다음 날(9일), 도미마사는 이에야스 본진에 불려가 선봉 자리를 빼앗은 것에 대해 질책을 받았으나, "요시다 시게타카의 지휘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했다.[13] 10일에는 니조성에서 미즈노 가쓰나리와 누가 가장 먼저 창을 겨누었는지(一番槍)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나, 증인들의 증언으로 도미마사의 공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무공을 높이 평가받아 이에야스로부터 금 50매를 하사받았다.[14]

2. 4. 다다나오 배류 이후와 만년

겐나 9년(1623년) 2월, 주군인 혼다 타다나오가 막부의 명령으로 배류 처분을 받게 되면서, 그의 영지였던 에치젠 기타노쇼는 여러 번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부가로(付家老, 주군을 보좌하는 중신) 동료였던 혼다 나리시게는 막부의 부름을 받아 마루오카 성을 다시 받고 후다이 다이묘로서 독립하여 중용되었다.

간에이 원년(1624년), 타다나오의 동생 혼다 타다마사가 에치젠 기타노쇼 50만 석을 상속받자, 도미마사는 그의 소속이 되어 후츄(府中) 4만 5200석을 받았다[15]. 이 과정에서 막부로부터 "그대로 남아 타다마사를 보좌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또한 막부로부터 독립 다이묘가 되라는 제안도 있었으나, 과거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받은 은혜를 이유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도미마사는 에치젠 번의 가신 수장으로서 주로 정치와 행정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여러 차례 영지를 추가로 받아 최종적으로는 4만 5천 석의 지행고를 보유하게 되었다.

간에이 11년(1634년), 막부의 다이로에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마쓰다이라 이즈노카미)가 임명되자, 도미마사는 자신의 관직명인 '이즈노카미(伊豆守)'가 노부쓰나와 겹치는 것을 꺼려 '탄바노카미(丹波守)'로 변경했다.

쇼호 2년(1645년) 8월, 3대 번주인 혼다 타다마사가 사망하자 은거를 신청하여 허락받았고, 아들 혼다 마사나가가 뒤를 이었다. 은거 후에는 겐가쿠(玄覚, 또는 겐가쿠사이 玄覚斎)라고 칭했다.

게이안 2년(1649년) 8월 12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6]. 법명은 후쇼인덴 겐가쿠쇼엔 다이코지(普照院殿玄覚紹円大居士)이다[16]. 묘소는 에치젠시에 있는 료센지에 마련되었다. 같은 에치젠시의 후지가키 신사는 도미마사를 제신(祭神, 모시는 신)으로 삼고 있으며, 그가 사용했던 도검, 갑주, 문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 도미마사가 죽었을 때, 당시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미쓰미치(타다마사의 차남)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7일 동안 영지 내의 모든 가무와 음악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는 "나라 안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도미마사 사후, 후추령은 "본번(에치젠 번)과 함께 영지 반감"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바쿠마츠 시기 9대 당주 혼다 소스모토에 이르기까지 혼다 가문이 계속 다스렸다. 그의 주요 가신으로는 마쓰모토 마사카쓰(마쓰모토 겐베)가 있다.

3. 내정

도미마사가 하사받은 에치젠 후츄는 과거 국부가 위치했던 에치젠국의 중심지였으며, 호쿠리쿠 가이도의 요충지였다. 당시 에치젠에서는 키타노쇼 다음가는 도시였으나, 도미마사 부임 당시에는 앞선 아사쿠라 씨 일족 멸망 시의 혼란, 잇코 잇키 진압,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잦은 영주 교체 등으로 인해 황폐해진 상태였다[1]

도미마사는 후츄 영주로 부임한 후, 영내의 히노 강 등 하천과 용수, 거리를 정비하고 새로운 산업을 장려했다. 또한 당시 시가지를 피해서 나 있던 호쿠리쿠 가이도를 마을 중심을 통과하도록 정비하는 등 마을 육성에 힘썼다[1]。 특히 황무지에서도 재배하기 쉬운 메밀 재배를 영민에게 장려했으며, 이 메밀에 무를 갈아 넣은 음식을 전속 의사와 메밀 장인에게 만들게 했다. 이는 오늘날 "에치젠 명물 오로시소바 (에치젠 소바)"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1] (다만, '에치젠 소바'라는 명칭 자체는 쇼와 천황이 후쿠이를 방문했을 때 맛본 후 자주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에치젠 후츄(에치젠시)에서 칼날, 직물 등의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

도미마사는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본번(후쿠이번) 영지에서도 치수, 도로 정비, 성곽 정비, 농지 정비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지역 사찰인 에이헤이지의 후계 문제를 막부와 상담하여 해결하기도 했다[16]。 에이헤이지에는 도미마사가 기증한, 데메파(出目派) 노면사(能面師)가 제작한 도겐 선사의 목조상이 남아 있다[16]。 또한, 주군 히데야스의 명을 받아 구즈류 강에 제방을 쌓고, "시바하라 용수"라 불리는 수로를 열어 키타노쇼의 생활용수 및 성의 해자 물로 이용하게 했다[16]。 이 용수는 현재도 후쿠이의 주요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으며, 제방은 도미마사의 은퇴 후 그의 이름을 따 "겐카쿠 제방(玄覚堤)"이라 불리며 현존한다[16]。 슨푸 성 축성 시에는 에치젠 후쿠이 번의 담당 구역 책임자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토목 및 치수 분야에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4. 격식

혼다 도미마사는 에치젠 가문의 가신, 즉 배신이었다.

하지만 혼다 가문은 여러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참근교대를 행했고, 이에야스에게 직접 행렬 시의 장비로서 나가나타 소지를 허가받았으며, 관문을 가마에 탄 채로 통과하는 것을 허가받는 등의 특례를 받았다.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에 머무는 해(참부(参府)의 해)에는 쇼군을 직접 알현했으며, 에도성에서는 야나기의 방 (중견 다이묘·고케와 동급)에 좌석이 배정되었다. 여러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에도에 저택이 각각 주어졌으며[17], 쇼군 가문의 경조사에도 여러 다이묘와 나란히 참가하는 등, 항상 다이묘로서의 격식을 부여받았다. 배신임에도 불구하고 게이초 16년 (1611년) 3월에는 종5위하를 수여받았다.

이는 도미마사 사후에도 계속되었고, 에치젠 후추 혼다 가문은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지만, 배신이라는 이유로 옛 다이묘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혼다 가문은 화족이 아닌 사족으로 분류되었다. 이를 불복한 옛 가신·옛 영민들에 의해 무생 소동이 발발했다. 무생 소동은 많은 처벌자를 낳았지만, 이러한 운동의 결과 혼다 가문은 다시 화족에 열거되어 남작이 되었다.

5. 일화


  • 무예에 뛰어나고 박식했지만 과묵하여 말솜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에치젠 소동 당시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열린 막부 직재 자리에서는 도미마사에 대해 "용모는 변변치 않고 변설 또한 뛰어나지 않다"라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성격은 온후하고 겸손했으며, "만단의 용인"(매우 신중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도 불렸다.
  • 도미마사가 다스린 후추 성은 과거 에치젠 후추 영주의 저택을 고쳐 사용한 것으로, 성곽이라기보다는 저택이나 진야(陣屋, 성곽 없이 관청과 주거 시설만 갖춘 영주의 거점)에 가까운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성터는 시가지로 변해 남아있는 유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옛 지도에는 담장이나 해자가 있었고, 지명으로 보아 마구간 등의 시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쇼군의 딸이 타다나오에게 시집갈 때 이곳을 휴게소로 사용한 뒤로는 통칭 "오차야"(お茶屋, 다실)라고 불렸는데, 이는 일국일성령에 따라 성(城)이 아닌 진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훗날 시인 노구치 우조는 "2만 석(에치젠 번 영지 반감 조치 때 후추령도 함께 반감됨)이라도 타케후는 성 아래 마을"이라는 시를 남겼다.
  • 교토의 공가인 가라스마 미쓰히로나 화가 다와라야 소타쓰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6. 계보


  • 아버지: 혼다 시게토미
  • 어머니: 불명
  • 정실: 오구리 시게쿠니의 딸[18]
  • 측실
  • * 장남: 혼다 마사나가 (1614년 ~ 1669년)
  • 생모 불명의 자녀
  • * 장남: 혼다 마사후사 (1635년 ~ 1671년)
  • * 장녀: 후렌 -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정실
  • * 차녀: 몬우 게키큐의 아내
  • 양자
  • * 장남: 요시마쓰 - 유키 히데야스의 넷째 아들

참조

[1] 웹사이트 ゆかりの人物|本多富正と府中 https://www.city.ech[...] 越前市 2022-12-26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논문 徳川一門付家老の成立過程と駿府政権 1999-03
[16] 웹사이트 本多富正公の生涯 http://www.mitene.or[...] 太平山・龍泉寺 2022-12-26
[17] 문서
[18] 서적 小栗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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